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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
환영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저희 비전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아름다운 교제의 공간을 주심을 주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비록 시작은 겨자씨 같이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 공간에 생명의 말씀과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샘물처럼

흐르게 하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하고,

새 생명을 얻어 쉼과 평안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마주 앉아

신앙을 고백하며 받은 바 은혜를 서로 나누는

성도의 교제의 장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함께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밝은 미래를 내다보며 젋은이들은 비전을 갖고

어른신들은 소망의 꿈을 꾼 사실들로 채워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가꾸므로

생육하고 번성합시다.

할렐루야!


목사님과 가족

......... ..



  사진을 클릭하세요(확대)


'정정관 목사는 류미자 사모'와 
결혼한  아들 내외 '정임엘과 이지혜'를


두고 있는 행복한 가정이며, 

아들 내외는 현재 침례신학대학 신학대학원

 M.div 3학년에 재학 중이다.


목사님 학력
  • 침례신학대학교 Th.B
  •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졸업논문 / '교회와 영성훈련' )
  •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 Th.M
    (졸업논문 / '귀납법적 설교' )

목사님 경력

  • 인천광역시 출생
  • 바레인 현   대교회(현대건설 바레인 사업소)
  • 이락크 바스라교회(현대건설 이락크 바스라 사업소) 
  • 송문침례교회(충남공주)
  • 비전교회(현 개척)

목사님의 걸어온 발자취

아버지의 발자취 눈물 피 땀  


1948년 인천 금곡동 출생 60세, 6.25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대한민국의 '아버지가 어떻게 인생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후대들에게 증언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우리 세대의 걸음들은 '눈물과 핏방울과 땀방울'로 점철된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전쟁으로 배고픔에 눈물을 흘렸고, 청년 시절은 월남 전선에서 피를 뿌렸고, 장년시절은 중동의 사막에서 땀을 쏟았습니다.   지나온 가시밭길을 회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시야가 뿌옇게 흐려집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의 외롭고 힘든 여정은 다음 세대 도약의 밑거름이 되었기에 가슴 뿌듯합니다. 후대들이 오늘 이 만큼 사는 것을 바라보면 우리의 젊은 날 삶의 몸부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다시 한 번 조국의 파란 하늘과 미래를 보며 지친 몸을 추슬러 봅니다.

'아! 나의 세대여'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먹으로 눈물 훔치고, 정글에서 피 뿌리고, 사막에서 땀을 쏟던 그 날의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 가보겠습니다.   

1. 잿더미 위의 눈물  

어머니 품에 안겨 큰 집 영종과 외갓집 용유도(영종과 용유도 사이는 인천공항)로 피난을 갔고 아버지 등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바라보았습니다. 대 여섯 살 박이 꼬마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행군중인 미군을 향해 애처롭게 "헬로 기브 미"를 외쳤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한 흑인 병사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남은 것을 주었습니다.

그때 그 사과를 받아들고 뛰며 좋아했던 일이 기억됩니다. 거리는 온통 국방색 물결을 이루고 노점상 좌판은 C.레이션과 초콜릿, 비스킷, 잼을 벌여 놓았고 그 옆에는 '슈산 보이'가 앉아 있는 것이 저의 어린 시절의 풍경입니다.      

당시에는 군복은 최고의 읍성(입을 것)으로 쳤습니다. 헌병은 거리단속에서 야전잠바를 입은 사람을 세워놓고 선 채로 등짝에 '염색'이라고 씁니다. 그것은 군복을 입되 검게 염색해서 입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글씨가 쓰여진 채 그대로 입고 다녔습니다.

그때 가장 인기 있는 옷은 미군 정복이 '사지'라는 기지인데 색깔은 짙은 누런 담요 색을 띄고 있고 국방색 전투복에 비해 약간 두껍고 고급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이 옷을 뒤집어(우라까이) 만들어 결혼 예복으로 입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놀이터로서 주로 전쟁물자 폐품을 재활용하기 위해 쌀아 둔 큰 마당이었습니다. 인천 중구 유동과 도원동 사이에 아주 큰 빈 마당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런 물건들을 불하 받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습니다. 코를 찌르는 냄새의 군복더미, 탄 티, 수통, 반합, 압박붕대, 야전 삽, 철모 그리고 첩첩히 쌓아놓은 군용 찝차와 스리쿼터 우리들은 그 사이에서 온 몸을 무장하고 전쟁놀이를 했습니다.   

소년 시절은

형님과 함께 장사를 했습니다. "아이스 케키 얼음 과자, 달고 시원한 아이스 께키, 앙꼬나 우유 오렌지"를 외치며 거리를 누볐습니다. 런닝은 땀에 젖고 바지는 녹은 얼음물에 젖었으며 가녀린 어깨는 탄띠에 눌려 멍들고 발갛게 까졌습니다. 얼마 후 어름이 필요 없는 스티로폴 통이 나왔는데 참으로 가벼웠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곰 표나 독수리 표' 밀가루 한 부대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갈 때 어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을 그리며 개선장군이 되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은

신문팔이로 '동 인천 역'에서 "석간이요 조선일보!" "내일 아침 동아일보!"를 외쳤습니다. 이때 역전의 스피커소리 "서울~행 발차."는 우리 신문팔이 목소리와 더불어 하모니를 이루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눈을 지긋이 감고 지금도 속으로 한 번씩 뇌어보는데 어떤 때는 눈물이 주르르 흐른답니다. 저 만치 흘러간 세월 저 편에서 "아이스 께키 얼음 과자!" "석간이요 조선일보, 내일아침 동아일보!"가 아련히 메아리쳐 옵니다.   

중학교 때 형님과 함께 조선일보 금곡동 지국에서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멀리 숭의동 영국부대가 주둔한 곳까지 였는데, 진눈깨비나 비 오는 날이 제 일 힘들었습니다. 사람은 젖어도 신문은 젖으면 안되기에 비닐로 겹겹이 싸고 뛰고 달렸습니다. 한 겨울 영하 20도 너무 추워서 온몸이 얼어붙었고 굳은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고 비벼 신문을 꺼내 돌렸습니다.

숭의 로타리 어디쯤 염색공장의 담벼락에 물탱크가 뜨근뜨근 했는데 우리 형제는 그곳에서 온몸을 굴려 몸을 녹이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걷는 일이 없이 거의 뛰어 다닌 그 날들, 형제의 머리와 온몸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집에 올 때쯤은 한기가 서렸습니다.     

지독히 가난한 초등학교 시절 점심은 거르기 일 수 였고 하루 두 끼 꽁보리밥과 수제비의 연속이었습니다. 부잣집 반장 도시락의 하얀 쌀밥과 노란 계란 후라이를 훔쳐보고 침을 꼴깍 삼키며 우물가로 달려가 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이 무렵 가난한 아이들은 미국의 원조로 노란색 강냉이 빵과 우유를 먹고 마시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때 부잣집 아이들은 우리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노릇노릇한 빵을 볼이 터져라 먹고, 흰 우유를 마신 후 입가에 묻은 우유를 혀로 돌려 닦을 때, 그 행복한 표정은 요즘 같으면 영락없이 'CF' 감이었습니다.  

우리 육 남매는 양조장에서 술을 거르고 난 '찌개미'인 '모주'를 얻어다가 사카린 넣고 펄펄 끓여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그 때의 숟가락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스픈' 이었는데 육 남매는 각자의 것을 갖고 있었고 그것으로 퍼먹었습니다. 달착지근한 모주는 사실 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술기운에 볼이 불그스레했고 단칸방 아랫목 윗목에 포만감으로 누워있는 모습들 그건 행복이었습니다.

아 그때는 온통 먹 거리 생각뿐이었습니다. 제분소에서 맨 나중에 나오는 가루를 '말 분가루'라고 하는데 사료로 쓰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서 봉지에 담아 옵니다. 약간 붉은 색을 띄었는데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면 무척 껄끄러워 삼키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배가 부르니 행복했습니다. '두부 만들고 난 비지'가 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창영동 골목의 '꿀꿀이죽'은 훌륭한 먹거리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추억이 있습니다. 우리 집 부엌과 옆집 부엌이 붙었는데, 담 사이 작은 들창이 있는데 그리로 옆집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집이 내일 아침먹이 있수?" "응 밀가루 남은 것 있어." "이것 좀 먹어봐!" 그렇게 해서 감자 몇 알이 넘어왔고, 수제비가 넘어갔습니다.

그때는 지게꾼 구루마꾼 등이 많았는데, 만일 일감이 없어 양식을 사지 못하면 온 가족은 꼼짝없이 굶는 것이었습니다. 겨울나기는 참 힘들었습니다. 부잣집은 연탄을 500~1000장씩 들여놓지만 가난한 이들은 하루 벌어 저녁에 들어갈 때 밀가루 한 봉지와 새끼줄에 연탄 2장 끼워 가지고 돌아갑니다.  

한 번은 제가 욕심을 내고 힘 자랑 돈 자랑? 할 겸 새끼줄에 연탄을 3장을 그러니까 양쪽 합 6장을 들고 개선 행진하는데, 줄이 끊어져 연탄에 다 깨진 것입니다. 어째 해야 좋을지 깨진 연탄을 대야 담아 '강원 연탄' 보급소로 가져갔더니 맘씨 좋은 아주머니 흔쾌히 바꿔주시면서 "총각 힘 자랑하지마" 그 시절의 사람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 씀씀이는 넉넉했고 훈훈했습니다.  

쌀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머니는 항상 양을 늘이기 위해 보리, 고구마, 콩나물, 김치, 잡곡, 끓인 밥 등으로 식단을 꾸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납니다. 왜냐하면 요즘으로 말하면 건강식을 저절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부자는 쌀밥, 가난한 이들은 보리밥과 수제비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밥을 푸다 모자라니까 누른 밥에 물 붓고 몇 술 뜨고 우물가로 나가 물로 배를 채웠습니다. 밥상이 들어오고 형제들이 둘러앉았습니다. 우리는 "어머니 것은 요?" "응 나는 부엌에서 배불리 먹었어"하고 배를 쑥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물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시는 것을 다 보았기에 형제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출" 이것은 당시 사용하던 용어로 한 숟갈씩 덜어서 또 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도 함께 식탁에 둘러 앉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기차 만드는 차량공장의 기술자였지만 전쟁 후 실직하시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폐품들을 수집해서 그것을 재활용하여 가정에서 쓰는 물건들을 만들었습니다. 드럼통을 두들겨서 펴고 자르고 붙이면 아주 희안한 물건들이 나오는데 그래서 저는 우리 아버지가 솜씨가 최고 인줄 압니다.

깡통을 작두로 자르고 펴고 뚝딱거리면 석유풍로와 화덕과 난로가 근사하게 나왔습니다. 그때는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주위에 많았는데 그들의 새벽의 망치소리가 동네를 깨웠습니다. 여기 저기 뚱땅거리더니 미군 스리쿼터를 개조해서 합승을 만들어서 타고 다녔으며, 나중에는 시발택시, 새나라, 그리고 현대차 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천 중구 유동에 '월남 촌'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은 월남에 민간인 기술자들이 많이 갔는데 인천에서는 주로 '한진 회사'로 가서 돈 벌어 온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비둘기 집 같이 아름답게 지었는데, 그래서 모든 이들이 그곳에 살기를 흠모하였습니다.

제가 19살 무렵 그곳에서 아버지를 도와 건축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잠이 오지 않는 '나이트 스루우'라는 껌을 씹어가며 밤을 꼬빡 꼬빡 새워가며 아버지를 도왔습니다.   한번은 매서운 추운 겨울 날,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나무 난로를 가운데 두고 여럿이 삥 둘러 이리 저리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저도 몸을 녹이는데 뒷짐을 지고 난로에 바싹대다가 그만 바지에 불이 붙었습니다. 어쩐지 좀 뜨겁더니만 황급히 불을 끄고 보니 바지 겉옷은 상했지만 속옷으로 인해 몸은 말짱했습니다. 그 날 한바탕 웃고 어머니가 내오신 점심 ‘동태두부찌개’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2. 월남 전선의 피   


 1970년 2월, 23살에 육군에 입대를 했고 얼마 후 바로 베트남 전쟁터에 지원을 했습니다.
"부모님 전 상서 이 편지를 받으실 때는 저는 이 억 만리 '월남전선'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송금한 돈은 그동안 모은 월급과 한국군 병사 일 년 치 월급인데 부모님과 동생들 굶지 않게 쓰세요. 또 월남에서 돈을 부쳐 드릴 테니 필요한데 쓰시고 동생들 공부중단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은반지는 꼭 끼고 있겠습니다."

이것은 파월 훈련소 오음리에서 눈물로 쓴 유언장이었습니다.   논산훈련소부터 왜 그렇게 배가 고픈지 돈이 있으면 PX에 가서 빵이라도 사먹을 텐데 그럴 형편이 안되었기에 늘 배가 고팠습니다. 창피하지만 식기 통을 씻고 나면 불은 밥이 물가에 모이는데 그걸 모아서 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자대 배치와 이어지는 훈련 그리고 맨몸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산기슭을 칡으로 시멘트를 온몸에 동여매고 적의 토치카를 향해 기어가듯 악착같이 오르고 방카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때의 힘의 근원은 군가에서 나왔는데 가사가 너무 좋습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어느 날, 달 밝은 밤 새벽 2시 보초를 서면서 끓는 피를 조국과 자유 평화를 위해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래 가는 거야 베트남!" 이대로 살수는 없어 날이 밝은 뒤 "소대장님 저 월남을 지원하겠습니다." 소대원들은 가면 죽는다고 극구 만류하지만 이미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중대장님은 저를 불러 제 병과로는 갈 수 없다고 하기에 "그럼 제 2병과로 가겠습니다.

"중대장님은 심각한 모습으로 "그 병과는 가면 죽어 타켓트야 살아 돌아오기 힘들어" 하지만 완강하던 제가 이기고 춘천 오음리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월남과 똑 같은 지형지물을 구축하고 밤 낯으로 훈련을 거듭하는 곳입니다.   훈련 중, 돌격 앞 지점에서 발에 뭔가 걸리는데 부비트랩의 인계 철선을 건드린 것입니다.

순간 '피식~꽝' 그 지뢰는 모형이었지만 곧 연기 신호가 오르고 저는 사상자로 분류되어 급히 후송되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지뢰를 밟았을까?" 불길한 예감에 혹시나 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당시 오음리 훈련소는 밥을 마음껏 먹도록 자유 배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식도 자대 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거기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조미료 였습니다. 식당에서 주는 쓴 된장국물에 이것만 넣으면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큰 것을 하나 사 가지고 다니는데 전우들이 "정 일병, 쪼끔 만 줘." 저는 크게 인심을 쓰면서 "너무 많이 치면 밍밍해"로 응수하며 아꼈습니다. 제가 인기가 있었던 것은 술 담배를 전혀 안 하기에 제 곁에 딱 붙어 있으면 누구든 화랑담배를 차지하게 됩니다.  

파월 이틀 전, '정정관 일병 부모님 면회'

'아니 부모님이 어떻게 알았을까?' 알고 보니 자대 에서 저의 월남 지원 사실을 통보했던 것입니다. 면회소에서 사색이 된 부모님의 모습을 뵈오니 죄스러웠습니다. 넋이 나간 어머니는 땅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불며 제 손을 놓을 줄 몰랐고,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버지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 날 부대 앞에서 '십자성과 야자수가 새겨진 은반지'를 사서 끼워주셨습니다.

그것은 적군이 물에 독약을 넣었으면 반지를 담가보고 마시라는 것인데 반지가 검게 변색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 부모님은 저를 가운데 뉘이고 서로 안으시며 꼬박 밤을 지새우며 한숨을 지으셨습니다. 다음 날 부대 앞에서 어머니는 하염없이 우셨습니다.

"이것아 난 너 없으면 못살아, 어쩌자고 전쟁터를 지원해가니" 그리고 끝내 주저앉아 대성통곡이었습니다. 시간은 부모님과 저를 떼어놓았습니다.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서신 어머니의 축 쳐진 뒷모습 아! 자식을 낳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불효인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훈련을 다 마치고 부대 마크를 달게 되는데 100 퍼센트 병과를 따라 부대가 정해지지만 드문 경우 다른 부대 차출도 있습니다. 예컨대 '주월 사령부' 혹은 비 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나' '십자성부대'로 배치되면 살아 돌아 올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침상에 앉아 초조히 기다렸습니다.  

전투부대인 '맹호' '백마'가 교차되어 부르다가 제 이름이 호명되면서 "정정관 맹호" 그리고 '맹호 마크'가 주어졌습니다. 속으로 신음했지만 의외로 차분하게 올 것이 왔구나 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날 밤 포효 하는 맹호 마크를 어깨에 부착하고 춘천에서 부산을 향하는 군용 열차를 탔습니다. 손에는 태극기 머리도 태극기 온통 태극기 물결 속에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 부대 맹호 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서울 청량리, 대전, 대구 등에 머무를 때마다 '가족들의 울부짖음과 한숨, 주저앉음과 실신' 그 날의 재회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된 경우가 허다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혈육과 고향산천을 뿌리치고 남으로, 남으로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이어서 부둣가에서 우렁찬 군악대와 부산시민들이 환송을 해주었습니다. 식순에 따라 합창을 부를 때 저는 사나이로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하지만 내 속은 슬퍼 울고 있었습니다. 군악대의 소리는 더 이상 우렁차지 않았고 '진혼곡'처럼 슬피 들렸습니다.        

1971년 6월 27일 거대한 회색 수송선 '바렛드호'의 계단에 발을 올리는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갑자기 가슴과 목이 메이며 어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습니다. 승선 후 갑판에 바짝 붙어 "잘 있거라 부산 항구야... 또 다시 찾아오마..." 부두의 여학생들의 사모곡의 합창은 처연하게 우리의 가슴을 때리고 울렸습니다.

마침내 '부~웅 부~웅' 출항의 뱃고동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일제히 "와~아"하고 자지러지는 외침과 탄식과 비명과 눈물이 부산항을 울리는데 고국산천은 온통 잿빛이었습니다. 이어서 수송선은 매정하게 부두를 뿌리치고 오륙 도를 벗어나 멀리 멀리 수평선으로 향했습니다.   

수송선에서 몇 가지 지시 사항을 받을 때, 인상 깊은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장병들은 일등국민이다." 이 말은 모든 일에 미군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다는 뜻입니다. 식당의 음식은 난생 처음 보지도 먹어보지 못했던 것으로 가득하고 '뷔페 식'이며 매끼니 마다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제일 힘든 것은 처음 사용하는 '양변기'로 도무지 앉아서 일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 전우가 기발한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변기 안에 휴지를 넣고 양변기 위에 올라가 쪼그려 앉아 일을 본다는 것입니다. 휴지를 넉넉히 넣지 안으면 튀어 오르니 조심하라는 안전교육을 받고 모두들 만족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월남 땅에 도착하기 전 날 밤 천둥번개가 얼마나 치는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갑판 위에 올라갔습니다. 하늘은 구름이 끼였지만 간간이 십자성이 보였고, 멀리 월남 땅이 거무스름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둥번개는 전투 중에 일어나는 포격전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자신만만하게 살아왔지만 "아!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이 밝고 하선하여 첫 발을 땅에 디딜 때 포연으로 인한 화약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사단본부까지 가는데 거리의 가옥들은 처참하게 부서져 황폐했습니다. 그 사이로 월남인들이 우리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힘이 없었습니다.  

사단본부에서 전투식량 C~레이션, 하얀 소금정제 한 움큼, 빨간색 말라리아 알약을 먹었습니다. 다음 날 방탄조끼를 입고 M16소총과 실탄을 최대한 몸에 두르고 맹호 26연대(혜산진부대)가 주둔한 '송카우 안빈탄'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방탄트럭에 올랐습니다. 우리를 호송하기 위해 기동성이 뛰어난 코멘다, 화력이 강한 APC 장갑차가 앞서고 병력을 실은 방탄트럭과 군수 물자 등을 실은 50여대의 차량이 1번 국도를 질주했습니다.   

베트콩은 주로 야자나무 숲 속이나 산모퉁이를 돌 때 기습을 해오기에 길 양편에 의심스러운 곳은 무조건 사격을 가 하였습니다. 길가에는 적의 B.40 로켓포에 맞아 불타버린 장갑차와 트럭들이 간간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꾸멍고개' '송카우' '안빈탄'을 지나 마침내 26연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신병 보충대에서 예하 대대 중대 부대배치를 또 기다렸습니다. 듣자니 어느 대대 및 중대로 배치되면 60-70%퍼센트는 전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전기를 틀어보면 숨가쁘게 날아드는 구조요청이 들립니다. 야간 비행을 하는 '다스톱브(구조헬리콥터)'의 굉음에 섞여 '낙엽 3' '절름발이 5' 낙엽은 전사이며 절름발이는 부상병이었습니다. “아 이제는 전투의 실전에 임하는 구나”하니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신병 보충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오후에 진중 예배가 있으니 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 군목님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목사님과 개인 상담을 할 사람은 밤에 벙커교회로 오라는 것을 끝으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 날 밤 유난스럽게 포탄과 예광탄 이 날아드는 날, 저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신앙을 갖기 위해 교회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마디 "목사님 저를 살려 주세요" 군목님은 이렇게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 문을 열고 굽어보시옵소서 이 전쟁터 생사의 갈림길에서 주님의 품을 피난처로 삼고 찾아왔사오니 원컨대 받아주시고 은혜와 긍휼을 입혀 주옵소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어느 상황에서도 침착하며 바른 판단을 주시고 담대함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기적의 보호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생사를 주관하시는 주님께 이 병사를 의탁 드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그 엄숙한 기도 앞에 저는 "살았구나"라는 안도감과 밀려오는 평안에 그저 감사해서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날 이후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기적 같게도 저의 원래 병과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소속은 주월 한국군 맹호(수도사단) 제26연대(혜산진부대) 전투지원중대였으며 다시 본부소대 중대장 '전령'으로 보직을 받고 23개월 동안 세 분의 중대장을 모셨습니다.    

전투지원중대는 작전 범위가 넓어서 일반 정찰, 정글 매복, 중화기 지원사격, 병참 수송에 따른 칸보이 호송, 연대의 전방위 OP 기지를 운용하였습니다. 저는 평상시 중대장을 돕고 상황에 따라 전술기지의 관망대에서 때로는 거미줄같이 연결된 방카에서 경계근무를 합니다. 참호에 크레모아 격발기, 수류탄 실탄 조명탄이 가지런히 놓여있어 즉각 대응하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한번은 우리 중대의 에께끼(대공포로 캬라바 5.0 네 문이 달렸는데 지상용으로 개조해서 사용함) 방탄트럭이 도로 매복에 습격을 받아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서 돌아왔는데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습니다. 사단 및 연대 급 작전에 앞서 엄숙한 행사를 치르는 데, 그것은 유서를 쓰고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 흰 봉투에 넣어 유사시 유품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여러 차례 이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대규모 작전 시는 누구나 시누크나, UH1 헬기를 타고 작전지역에 투입합니다.   옛날 프랑스군이 전멸했다는 묘초산 정글에 헬기로 랜딩하고 4.2인치 박격포를 쏘던 일, 고엽제가 뿌려진 정글과 늪지대 통과, 특히 우리 맹호사단의 이웃 기갑 연대의 '안캐패스 전투'는 전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웃 수색중대는 주로 정찰임무인데 특히 매일 하는 도로정찰은 그 중 매우 위험합니다. 그 날도 수색중대의 첨병이 AK47 실탄에 철모가 뚫리고 머리를 관통한 일, 엄호를 받으며 접근했지만 철모에 피만 흔건히 고인 채 말이 없었습니다.   이웃 부대는 매복에 들어가다 부비츄렙에 걸린 일, 호송을 맞은 APC 장갑차가 B40에 맞아 그 안의 전우가 모두 숯덩이가 된 일, 세이파 공격으로 중대 전술기지가 유린되어 한 소대가 전멸된 일, 그래서 남은 전우가 유품을 정리해서 고국의 부모님께 보낼 때는 피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 한국군은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자유 평화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헬기장에 급한 부상병이 들어올 때 군목은 가장 먼저 달려가서 팔다리가 잘려져 나간 전우, 가물가물하는 의식을 잃어 가는 전우를 끌어안고 정신 차리라고 호령합니다. 그 군목님은 우리 중대 방카 내무반에 오셔서 찬송가에 앞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 꼭 살아 돌아가자고 부둥켜 않아 주며 기도 해주었습니다. 병사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날 목사님은 연대 정문 방카 위에 올라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해주시는 모습은 영원히 기억에 남습니다. 귀국할 때 저도 B형 박스를 가져왔는데 그 안에는 C-레이션을 비롯해서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선호하는 것은 탄피였습니다. 큰 탄피에 작은 탄피를 끼고 박고해서 고국에 가져가면 돈이 꽤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별의 별것들을 다 고국으로 보내졌고 항해수당에서부터 전투수당인 모든 월급은 고스란히 고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저는 월남 복무연장으로 인해 한 달간 휴가를 얻어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에서 오산비행장으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오산비행장으로 내린 이유는 '영현'과 함께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전우들은 동작동에 고이 잠들어 있고 앞서간 전우들의 피 값은 이 조국을 번영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피 흘리고 돌아온 고엽제 전우들을 정부가 돌보기를 간청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외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몸 안에 흐르는 다이옥신으로 인해 살이 마르고 뼈가 뭉그러진 것을 누가 보상해줍니까? 늙어 가는 전우들에게 언제 햇볕이 찾아 들는지? 요즘은 작전 중, 정글에서 마셨던 물이 혹시 고엽제로 제 몸에도 남아있지 않는지 때로는 불안하기도 합니다.  

본국 휴가 중 집에 와보니 대문에 '용사의 집' 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어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여러모로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고 합니다. 다시 월남으로 원대 복귀해서 근무 중 스피커에서 이런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여기는 인천시청입니다. 인천 출신 장병들은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우들은 "정병장님 인천입니다." 잠시 후 첫 번째로 한 어머니가 나오셨는데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정관아! 엄마다. 네가 휴가 다녀 간 뒤로 이 에미 마음이 훨씬 안정 되었구나 집과 동생들 걱정은 말고 너나 몸 건강히 있다가 무사히 귀국하기를 엄마는 매일 기도드린다."  

현행 참전용사에게 주어지는 보훈 혜택은 65세 이상 월 7만원입니다. 저의 참전자의 작은 소망과 바램은 그 작은 물질보다 국가를 가난에서 구해낸 우리 전우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죽어도 눈을 감을 것 같습니다. 요 즘 별의 별 이상한 부분에 국가유공자가 붙고 우리 전우는 외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불쌍한 내 전우들이여!"     

제대 후 참전용사의 피로 깔았다는 경부고속도를 처음 달렸을 때, 번영의 기쁨보다 동작동으로 간 전우들 생각에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후 지금까지도 이상한 현상이 제 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통과할 때, 나도 모르게 숨소리가 작아지고 온몸을 움츠러들며 경계하는 행동을 취합니다.  

지금도 헬리콥터 소리를 들으면 몸이 사려지며 동시에 환영으로 M.16 개인화기를 앞에 총 한 채, 방아쇠의 자물쇠를 풀고 노리 쇠 후퇴 전진, 약실에 탄환이 들어갔는지 확인하는 액션을 취합니다. 왜냐하면 적과 조우할 때 최초의 한발 발사가 누가 먼저인가에 따라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좋아라하는 밤하늘 불꽃놀이 그러나 참전용사는 또 다른 환영으로 그 날 전쟁터의 야간 사격과 오버랩 되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중대 급 전술기지 베이스캠프별로 실전은 물론 야간에 최대 화력을 실시합니다. 이때 하늘은 각종 조명탄으로 크고 작은 빨갛고 노랗고 푸른 색깔로 제 각각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고, 추진 체는 "쉬이~쉬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곤두박질합니다.

4발에 하나 낀 예광탄은 진분홍색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표적을 향해 날아가고 그 뒤로 집중사격은 빗발치듯 날아갑니다.   병사들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고요와 적막입니다. 그것도 어둠 속에 적막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조명탄을 올리고 크레모아를 터트리고 총을 쏘고 콩 복 듯한 총소리가 돌아 내 귀에 들릴 때 나는 평안해집니다. 그것은 곧 나는 두려움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 이 환영과 이 역설을 누가 알겠습니까?'  

프랑스 파리에서 1973년 1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고 연합군은 60일 이내에 철수를 해야 합니다. 저는 제대를 넘겨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휴전 직전이었기 때문에 교체병력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의 철수병력은 아주 위험하기에 꾸멍 고개를 넘어 돌아갈 때는 방탄 트럭에 또 매트레스를 덧대어 탄환이 뚫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아 마침내 1973년 3월 9일 퀴논 푸캇 비행장에 이륙하면서 살았다는 안도감을 가졌고 대구 동춘 비행장으로 23개월 만에 무사히 귀국 26세에 전역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34년이 흘러 60세가 되었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혹시나 하면서 고엽제 후유의증 신고를 위해 침례병원에서 검진결과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이었습니다. 2007년 8월 부산보훈병원에 고엽제 후유의증 신검을 마쳤습니다. 그날 옛 전우들을 만났는데 약 40명 정도가 신검을 함께 받았는데 모두들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휠체어의 전우, 지팡이 몸을 의탁한 전우, 정말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습니다. 저는 지금 부산 원호병원에서의 고엽제 등급 판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 중동 사막의 땀  


첫째, 바레인 에서  

1978년 제대 후 31세 까지 국내에서 억척으로 살면서 꿈을 키워갔습니다. 하지만 더 큰 꿈을 이루고자 현대건설의 해외 현장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목표는 약혼 한 처녀와의 보금자리 집과 중단한 학자금 그리고 선교현장을 둘러보고 싶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다란 공항에 도착하니 사막의 열풍에 숨이 탁 막힙니다. 월남은 야자수 그늘 아래는 시원한데 여기는 섭씨 40~50도로 그냥 숨이 턱 막힙니다.   공항에서 잠시 밖을 나갔더니 이것은 마치 한증막 같았습니다.

고국에서 한증막에 들어갔다 뜨거우면 나오면 되지만 여기는 반대로 그곳에서 일상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겨우 식사 할 때나 취침 때 에어컨이 있는 숙소 바라크로 피하지만 나머지는 사막의 건설현장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프로펠라식 페어차일드 비행기를 타고 옥색 빛깔의 아름다운 페르샤만을 낮게 날아간 바레인 공항 그리고 '마하락'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현대건설은 드라이도크 항만, 국방성, 외무성, 병원, 정부부속 건물 등 수많은 크고 작은 건설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이른 아침 6시에 기상 어둠 속을 지척이며 아침을 먹고 버스로 현장에 도착하면 7시 30 분 경 입니다. 우리가 건설 현장에 도착하면 모두 부서별로 도열한 채 국민의례 두 가지를 시행합니다.

첫째, 태극기 앞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입니다.

 “국기에 대해 경례” 이어서 “애국가 제창”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둘째, 국민교육헌장 낭송입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이때 어쩌다 일찍 나온 현지 중동인 이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카니스탄 사람들은 우리를 신기하 듯 바라보며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현대 기술자들은 모두 똑같은 옷을 입었고 동작 또한 기가 막히게 빠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모두 군 생활로 정신과 체력이 다져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바쁠 때는 뛰는데 그것이 그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에서는 도둑놈만 뛰지 보통 그냥 어슬렁입니다. 한참 일하다 보면 그때야 현지인 들이 출근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은 언제 잤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우리들 보다 먼저 퇴근하고 우리는 늦도록 일하다가 숙소로 갔다가 겨우 눈 좀 붙이고 나왔으니 그들의 눈에는 잠자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이상해 보인 것입니다

"아 이것이 진정 중동 건설현장의 신화 이야기랍니다." 

이마의 땀은 흐르다 아예 말라버리고 옷은 소금으로 버적입니다. 월남에서처럼 소금정제를 한 움 큰 씩 먹으며 현기증을 견뎌냅니다. 당시 정치 타운 건설에 인도 등 여러 나라가 참여하였는데 그들의 건물들도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속도 면에서 그들은 혀를 내 둘렀습니다. 우리는 10층을 올라갔는데 그들은 겨우 1~2층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인도 회사는 장비가 없어서인지 시멘트 몰탈을 세숫대 같은 곳에 담아서 일렬로 주~욱 서서 붓습니다. 그것도 야근이니 잔업이니 그런 것은 아예 없고 마냥 느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기술진으로 만든 중장비로 밤 낯없이 일하니 상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우리 현대 마하락 캠프 베이스 기지를 가려면 바레인 비행장 옆을 지나치는데 한번은 덤프트럭하고 콩고드 비행기하고 누가 더 빠른 가 경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콩고드는 지상에서 뜨고 내릴 때는 꼭 여치같이 뾰족한 머리를 수구리고 이륙하는데 우리 덤프트럭이 더 빨리 달렸다는 것입니다. 말이 그렇겠지만 그렇게 달리고 달린 것입니다.      

점심식사는 기지로 와서 먹는데 너무 덥고 많은 땀을 흘려서 인지 미역오이 냉채만 벌컥 벝컥 들이키고 바라크 침상에 누우면 천장이 노래집니다. 그래도 현대건설은 모든 것이 풍족해서 먹을 것은 그야말로 산더미 같이 쌓아 놓았습니다. 하지만 도통 식욕이 당기지 않습니다.

현대는 고국으로부터 밧지선에 무엇이든 싣고 타그 보트로 끌고 옵니다. 그래서 음식이 풍족하고 현지 조달도 최고급으로 구매합니다. 싱싱한 과일 먹을 것 마실 것은 참으로 풍족했습니다.  

한번은 주방장이 무슨 음식이 먹고 싶은지 설문조사를 했는데 '족발'이었습니다. 중동사람은 돼지고기를 안 먹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아무튼 족발이 식당 문 앞에서부터 대형 소쿠리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았습니다. 우리는 그걸 하나 씩 집어서 새우젓에 푹 찍어 물어뜯으니 기가 막히게 맛있어 인기 짱이었습니다.  

우리 설비 팀의 ‘에어 콘 샵의 포니 픽업’은 긴급 AS 전용차였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오직 임무완수를 위해 달립니다. 운전기사는 현지인 이고 선임탑승은 팀장이 타고 나머지는 그냥 적재함 바닥에 앉는 것입니다. 이때 비가온면 물에 빠진 생쥐처럼 그대로 젖는 것입니다.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현장으로 달렸습니다.

그때 저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뇌었습니다.   "이건 전투다. 그래 맞아 전투야... 3년만 참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희한하게도 숙소로 돌아 올 때는 옷이 다 말랐습니다. 비가 개면 옷은 입은 채로 순간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현장을 오가면서 가장 반갑게 맞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 오는 KAL 기였습니다.

누구든 우리 비행기가 지나가면 멀리 가물가물 안 보일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한번은 본부 사무실이 밤새워 불이 켜졌습니다. 알고 보니 바레인 정부가 발주한 공사에 입찰을 넣고 기다리는 데 "와~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공사를 수주하게 된 감격과 축하의 소리로 달라를 벌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중동의 현대 건설을 이끌어 가신 분은 이명박 사장님이셨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고 정주영 회장님 등 모든 임직원들의 국가적 헌신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당시 앞서 오신 선배들이 '현대바레인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막사에 있는 것보다 교회에 있는 것이 더 좋아서 늘 교회를 청소하며 돌보았습니다.

예배의 설교는 순번을 정하고 돌아가면서 인도하는데 효과적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었고 그래서 회의 중 한 사람을 천거해서 회사에 상신 교회를 돌보도록 했는데 제가 피택이 되었습니다.   서울 현대건설 본사의 신우회와 연락을 취하며 또 고국의 어려운 교회를 도우며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역경들을 극복했습니다.

그때 믿음의 동역자들이 눈에 선합니다. 대사관 직원과 영사님 가족 그리고 영빈관 식구들 임 직원들과 비서실 친구 그리고 현지 '살마니아 호스피탈'에 취업한 한인 간호사들 성탄을 준비해서 모든 직원들 앞에서 발표회를 가지던 그 날 밤이 그립습니다.  

우리 샵에 근무하던 현지인 운전기사 두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열매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현지인들과 접촉하기 위해 '마나마시티'(수도)에 나가 영국인 교회를 가끔 갔습니다. 80대가 되시는 선교사님이 계셨는데 한인들을 잘 위해주셨고 성실과 근면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선교사님 말씀이 동료들은 다 순교 당하고 자기만 남았다고 하시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나라 교민이 많아지면 언젠가 시내에 교회가 세워 질 것을 기도 드렸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로고스가 입항한다는 소식을 듣고 특히 한국인이 승선했기에 교인들과 함께 위로해주러 갔다가 위로를 받고 왔습니다.

감사한 것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한인들이 중심에서 활동한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1979년 이란의 회교 혁명으로 팔레비 왕이 폐위되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우리 현대 기술자들이 그곳 이란에서 진출해 있다가 '타그 보트와 밧지 선'에 실려 바레인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쳐 숙소가 없으므로 교회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임시 숙소로 개방했었습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시기였습니다. 땀과 눈물의 뒤범벅 이였죠 갑자기 들이닥친 난민들 해외에 나가면 모두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교회의 역할은 매우 컷 습니다. 향수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교회에 엎드려 토로했고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어 정상 근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폭한 사람이 난동을 부리는데 알고 보니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국에서 부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것입니다.

안전관이 교회의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는 그를 안정시켜 본국과 연락을 취하며 양쪽이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했고 모두 안정을 찾은 것입니다.  

둘째, 이락크 에서                 

시간이 흐르고 1979년 10.26 이때 애석하게도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해를 당했고 우리는 한때 전쟁에 대비해 귀국을 준비하기도 했었습니다. 이 무렵 저는 이락크로 발령을 받고 애도의 검은 리본을 단 채 바그다드로 날아갔습니다. 페르샤만을 거쳐 유프라데스 강을 한참 거슬러 올라 간 유서 깊은 바그다드, 어려서 읽은 ‘천일야화’의 열려라 참깨 40인의 도적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곳은 낭만의 도시가 아닌 후세인을 우상처럼 여기는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였습니다.   우리나라와 수교도 안 된 그런 나라에 순수 민간회사 우리의 현대가 진출한 것입니다. 그곳에는 북한대사관이 있었기에 영사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고 최대한의 경계를 했습니다.

하지만 팩스가 연결되지 않아 바그다드 현대 사무소는 저의 송출 소식을 몰랐고, 저는 바그다드 공항에서 회사 직원이 데리러 오기를 꼬박 24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혹시 공항 경비대가 나를 수상히 여기고 북한 대사관에 너희 나라 사람이 있으니 데려가라면 어떻게 하나 큰 걱정이 되었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나중에 송출소식을 접한 현대 직원이 황급히 달려 나왔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저는 '현대 자동차'에 '현대 마크'를 부착한 동포를 보며 크게 기뻐하고 안도했습니다. 저 역시 '현대 옷'에 '현대 마크'를 달았기에 동료들은 즉각 알아보고 얼싸안았습니다. 저는 현대 사무소의 동료 품에서 오랜만에 평안하고 깊은 단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바그다드에서 다시 허호 소장님이 이끄는 바스라로 날아갔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서울은 바그다드요 부산은 바스라입니다. 유프라테스 티크리스 강이 페르샤만에 유입되는 항구도시 바스라 그곳은 석유 매장량이 엄청나고 최대의 정유소가 있으며 오일을 수출하는 기지입니다. 이곳에서 현대는 방대한 '바스라 하수처리장'을 건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현대 바스라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관리과 소속으로 에어컨디션 샵을 혼자 이끌어 갔으며 베이스캠프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교회대표로 틈나는 대로 병원에 입원한 동포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매몰사고로 거의 죽게 된 '동료'는 제 눈에는 영락없이 피와 땀 흘리는 '전투중의 전우'였습니다. 시간을 쪼개서 죽을 쒀서 갖다 먹이고 함께 예배를 드리며 쾌유를 위해 주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때 허호 소장님의 사모님 박정희 집사님과 어린 훈이가 바스라에 살러 왔고 박 집사님의 헌신의 땀방울에 교회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위로 받고 많은 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날에 헌신들을 기억하시고 상급을 후히 주실 것입니다.         

포크레인 삽을 머리에 맞고 영안실에 가있는 안타까운 우리의 전우들 마지막 알미늄 관에 담아 KAL 편으로 고국으로 보낼 때 우리는 두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었습니다.

한번은 목수로 일하시는 분이 실족해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귀국을 해야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사연인즉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지금 귀국하면 무엇으로 혼수를 준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눈물지으며 안타깝게 매달리며 애원하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의 애련한 청원이 받아들여져 본부 막사의 화장실 청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일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적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분이 다친 다리를 이끌고 어떻게 일하나 가보았더니, 절둑 이면서 일하는데 사기로 만든 변기통을 끌어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딱는 데, '변기 통'이 번쩍번쩍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깨끗이 할 수 있어요" 했더니 "이건 내 밥그릇입니다."하고 환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파리는 자취를 감추고 정말 밥을 먹어도 괜찮을 만큼 청결하게 만들었습니다. 딸의 혼수를 그렇게 준비했던 아버지,

사랑하는 대한의 딸들이여! 아버지 세대는 그렇게 땀을 쏟고 흘렸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저는 회사에서 휴가를 얻어 성경에서 나오는 메소포다미아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란 국경 쪽으로는 검문검색이 상엄 했습니다. 남쪽에 위치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지구랏' 에덴동산이라는 '엘리두' 중부에 위치한 '바벨론 성' '바벨탑' 바그다드를 돌아보는데 검문이 더 심했는데 전운이 감도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다시 남부 바스라로 귀환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도로를 바라보니 탱크들이 끝도 없이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스라 시내는 곧 전쟁이 날 것이라고 술렁거렸고 마침내 이락크가 이란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 이라크와 이란 양국 간은 오랫동안 영토분쟁으로, 긴장을 유지하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여 1988년까지 백만 명이 희생되는 전쟁이었습니다.  

바스라 시내는 완전 무장한 전투복 차림의 군인이 넘쳐났고 이란 국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우리 현대회사 캠프 베이스는 바라크로 꼭 군대가 주둔한 막사 같아서 이란 공군의 폭격 제 1순위였습니다. 회사는 공사를 중단하고 출근을 하지 않은 채, 소개령이 내린 캠프에 머물며 각자의 안전을 지켰습니다. 이동도 멈추고 쿠웨이트로 향한 국경도 폐쇄되었습니다.  

저는 곧 교회로 달려갔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정말 힘들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자유통일 위해서 베트남을 전쟁 치렀고 이제는 이 건설현장에서 또 전쟁을 맞았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현대 건설 직원 전원이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인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니 저 뿐 아니라 모두들 교회로 기도하러 왔던 것입니다. 모두 눈물로 하나님께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안전을 위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 날 공중에는 전투기들이 어지럽게 날고 국경선 쪽에서 여기저기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전이 폭격을 당하고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 덮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후세인이 사용하는 '독 GAS' 살포였습니다.   만일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우리는 꼼짝없이 피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후세인은 쿠르드족에게 이 '독 GAS'를 사용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란은 물론 이라크 병사까지 타 들어가는 목을 움켜쥐고 방카 밖으로 기어 나와 뒹굴다 죽는 것입니다.   본국에서 정부와 현대회사로부터 긴급타전이 왔고 마침내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회사는 많은 장비를 모두 수송부에 집결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개인 짐을 꾸려서 트레일러에 싣고 버스에 분산한 채 쿠웨이트 국경선 근처로 달렸습니다.

어찌하든 이란 공군기로부터 공중 폭격을 피해야 했기에 길을 피해 넓은 사막으로 우회해서 멈추고 달리기를 반복했습니다.   낮에는 엄청난 사막의 더위를 피해 조그마한 천과 박스로 가리 우고 밤은 또 추웠습니다. 저는 참호를 파고 들어가 있었는데 그런 데로 견딜 만 했습니다. 밤에 모든 불빛은 보이지 않게 하고 소등을 했고 거기서도 우리는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의 숨죽인 찬송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지나던 그 광야를 그야말로 같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쿠웨이트 국경선에 도착했는데 그 통과 절차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또 기다렸습니다. 웬만하면 통과 시켜주지 우리는 언제 폭격 당할지 모르는 데 안타까운 가운데 드디어 전원 국경을 통과하였습니다.

거기서 우리 현대직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얼싸안으며 수고했다고 모두들 눈물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숙소는 호텔로 이미 준비되었고 우리는 오랜만에 편안함을 누렸습니다. 몇 일후 대한항공 특별기가 왔습니다. 공항에 나가 선명한 태극기와 KAL을 목격하는 순간 목이 메이고 눈물이 또 쏟아졌습니다.

참으로 오 랫 만에 내 나라 비행기를 타고, 내 나라 동포 스튜디어스의 위로를 받으며, 안정 속에서 깊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김포공항 내 조국 땅의 산하, 그리고 유난히 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겨 맞아주었습니다.

삼년 동안 한 번도 몸을 떠나지 않고 지니고 다녔던 빛바랜 약혼녀의 사진이 이제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들아!" "오빠!" "어머니" "애들아" 했지만 이게 남자인가 봅니다. 손은 어머니를 잡고 동생을 잡았지만 눈은 약혼녀를 찾아 두리번거렸습니다. 

 저 만치 약혼녀가 눈에 띄었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지새웠겠습니까? 나중에 약혼녀가 한 이야기지만 약혼자의 모습이 외국서 돌아오는데, 때가 꼬질 꼬질 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나오는 모습이 불쌍 하기도하고 우습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래도 빛바랜 양복이라도 입었지만 대부분 동료(전우)들은 전쟁의 피난민답게 슬립퍼에 러닝셔츠 차림이었답니다.     


마무리 글.   


그렇게 원했던 작은 집은 장만했고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게는 또 다른 인생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못다 한 공부,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공부, '책가방'이 '연장가방'이 되었던 그 아픔과 시련의 사연들을 이 시대의 아들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서 중동에서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이 '삼손 나이트 가방'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꼭 12년을 공부했습니다.   인천 등용문학원 엄인배 집사님의 수학부터 시작해서, 새벽에 도시락 두개를 싸들고 인천 제물포의 대성학원, 서울노량진의 정진학원 등 '학력고사 재수'까지 3년, 그리고 85학번으로 대전의 침례신학대학 4년(Th.b), 침례신학대학신학대학원 3년(M.div), 침례신학대학대학원 2년(Th.m). 참으로 긴 세월을 학문에 몰두했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뒷바라지 한 아내도 그사이 부산에서 대전까지 다니며 침례신학대학 상담심리학과 4년을 마쳤습니다.   

  훨씬 전 신혼시절 한번은 학력고사를 준비하는데 학원으로 아내가 찾아왔습니다. 자장면을 사준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먹었으니까 나만 먹으면 된다기에 자장면 한 그릇을 앞에 놓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맛있게 먹는데 거의 다 먹어갈 무렵 아내가 "오늘 무슨 날인 줄 알아?" 자장면을 입에 물고 "몰라" 했더니 "오늘 결혼기념일이야" 힘든 세월에 사실은 자장면 한 그릇으로 결혼기념일을 지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결혼기념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결혼 일은 '11월 11일 11시'였는데, 요즈음은 뭐 '빼빼로 데이'라 해서 그 날 사랑하는 이들이게 고백하며 난리들입니다. 그래서 지난 11월11일 '칼국수' 집에 가서 이번에는 당당히 두 그릇을 시켜놓고 마주보고 앉아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아들 부부는 내외가 지금 침례신학대학신학대학원(M.div) 3학년 졸업반입니다. 이 녀석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하는 말이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에, 나 뭐 사 줄 꺼야?" "예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왜 널 사주니" "그래도 나 뭐 사 줄 꺼야?" 이상한 논리의 항변에 우리 부부는 웃고 말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들의 요구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의 열매이자, 분신이자, 삶에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1987년도 공주 '송문교회'를 첫 목회로 지금은 부산에서 '비전교회'를 개척하고 작은 교회지만 영혼을 사랑하고 서로 섬기며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의 작은 소망은 제게 남은 '눈물과 피와 땀'을 이곳 부산에 흘려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한 세대를 살아온 아버지로서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걸어온 발자취를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게 전하니 참으로 기쁩니다.  

이 글을 후대에 전하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아들아, 아버지의 세대를 잊지 말거라, 지금 너희들이 누리는 경제의 풍요는 ‘눈물과 피와 땀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너 또한 강하고 담대하므로 네 아들에게 더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물려주기를 기대한다. 사랑한다 아들아!”  


하늘이여...


“하늘이여! ‘월남 참전자’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땡그랑~ 땡~” “땡그랑~ 땡~” “땡그랑~ 땡~”

끊어질듯 이어질듯 호소하듯 애처롭게 들려오는 종소리, 사람들은 예사롭지 않은 종소리를 듣고 광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광장에 매달린 종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임금님에게 상소하는 ‘신문고’(申聞鼓)였기에 더욱 궁금해 달려가며 서로 대화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종소리가 여느 소리 같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마침내 광장에 도착한 군중들은 종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종을 치는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눈이 휑하고 비쩍 마른 늙은 군마(軍馬)였습니다.'  얼마나 굶었는지 배가 훌쭉하고 갈빗대가 다 드러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온 몸은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가 역력했습니다. ‘군마’는 먹을 것이 없어 방황하다 마침 광장 한 가운 데, 늘어져 있는 종 줄인 마른 포도 넝쿨을 잡아당겨 먹다가 종을 치게 된 것입니다. 관가에서는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무슨 사연이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도대체 이 말의 주인은 누구일까? 수소문 해보니 한 장군의 군마였었는데 늙고 병들자 버린 것입니다. 장군은 젊었을 때 군마와 더불어 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생사고락을 같이하였습니다. 군마의 도움으로 수 없는 전투에서 목숨을 건졌고, 영웅 칭호와 훈장을 받았습니다. 반면 늙은 군마는 전상의 상처를 끌어안고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급기야 몹쓸 장군은 엄청난 은혜를 저버리고 생명의 은인인 군마를 내 쫓아 버렸던 것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1959년), 11살 무렵 교과서에서 본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 당시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 병든 군마가 얼마나 불쌍했는지 엉엉 울었습니다. 안타까운 추억을 가슴에 안고 세월이 흘러 현재 나이 63세가 되었고 기가 막히게도 그 버림받고 병들고 늙은 군마(軍馬)의 입장에 제 자신이 처하게 된 것입니다.

“월남 참전 그리고 고엽제 후유의증 등외 자”

제 소속은 ‘주월 한국군 맹호 26연대(혜산진부대) 전투 지원중대’로서 1971년 6월 27일 파월 ~ 1973년 3월 10일로 21개월의 전쟁을 마치고 철수부대로 귀국하였습니다. 60세 되던 해, 2007년 8월 이후 자고 나면 얼굴이 붓는 등, 몸에 이상이 와서 부산침례병원에서 검진결과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였습니다. 다시 부산보훈병원에서 검진결과 ‘고혈압과 당뇨’는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상이 따르는 ‘고도, 중등도, 경도’의 기준에는 미달되므로 ‘고엽제 후유의증 등외 자’로 분류 되었으니 보상은 없고, 다만 보훈병원에서 약을 무료로 타다 먹으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래도 중증이 아니기에 다행으로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저의 친구 중 ‘백마용사’는 ‘고도 판정’으로 보상을 받으나 차마 보기 민망하며 일상생활을 포기한 채 보훈병원에 입원하고 있습니다.

이 무렵 저는 1948년생인 저의 세대들이 걸어온 발자취로서 ‘어린 시절 6.25의 눈물, 청년시절 월남전쟁의 피, 장년시절 중동 건설현장의 땀’등의 제가 겪은 삶을 현장을 담아서 기록했습니다. 제목은 ‘아버지의 발자취 눈물 피 땀’이라는 수기였습니다. 이글을 쓰게 된 동기는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밑거름에 우리 세대의 ‘눈물 피 땀’이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후 3년 동안 보훈병원에서 약도 무료로 받고 검진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등외 자’의 처우에 대해 ‘국가가 참전자를 버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고엽제 등외 자’는 10만이 넘으며 아무 보상도 없이 매달 아픈 몸을 이끌고 단지 약만 타러 보훈병원에 갈 뿐입니다. 하루 쉬고 병원 간다는 것이 경제적으로 너무 힘듭니다. 그러므로 ‘등외 자’에게도 최소한의 수당은 지급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현실이 어려우면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안고 가겠지만 세계 경제 10위 선진 세계화를 외치며, 민주화 유공자 보상, 선진 복지 정책을 펴낼 때 우리 참전자는 어설픈 보훈정책에 심한 소외감과 자괴감과 냉대감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2010년 6월 현충일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 “국가위해 희생한 분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하셨으며 보훈정책을 올바로 정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부디 대통령과 대한민국은 병들고 늙은 군마(軍馬)를 버리지 마시기를 애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형편과 처지 그리고 절실히 요구되는 사항을 정리해서 탄원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보훈정책에 반영이 되므로 얼마 남지 않은 생명, 우리 월남 참전 전우들의 생애에 희망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두 가지로 1. 우리가 처한 서글픈 현실, 2. 우리 요구의 당위성과 필연성 순으로 글을 올리겠습니다.

1. 우리가 처한 서글픈 현실

첫째, 전쟁 후유증

‘전쟁 참전자’ 40여년이 넘게 흘렀지만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상처들을 갖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감추어진 아픔을 얘기하면 믿으시겠습니까? ‘한 밤중 환상 속에 M16 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식은땀에 흠뻑 젖어 헛소리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면’ 믿으시겠습니까? ‘잠결에 조명탄 띄우고 크레모아 터트리고 수류탄 투척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날에 너무 충격적인 참상이 나를 사로잡고 환상 속에 떨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지금도 정글 속에 갇혀서 어둠속에 길을 잃고 방황하다 벌떡 일어나 흐느껴 운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지금도 날짜를 세며 애타게 귀국선을 기다리며 밀림 속에 묶여 있다면’믿으시겠습니까? 참전자들은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는 과거 신체적인 손상 및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인 장애입니다.

만성의 경우 후유증이 심해서 환자의 30% 정도만 회복되고, 40% 정도는 가벼운 증세, 나머지는 중등도의 증세와 함께 사회적 복귀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월남 참전자들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국가의 책임 하에 특별 보호 관리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PTSD’ 증후군에 따른 심리 치료를 받거나 보호 관리 같은 경우는 아예 사치에 속하며 그대로 방치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둘째, 경제의 밑거름

1948년 태어나서 일제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었고 바로 1950년 6.25전쟁의 참화, 아무것도 없는 잿더미였습니다. 고픈 배를 꿀꿀이죽으로, 원조 물자 강냉이 죽과 우유가루로 연명하며, 하루 두 끼 수제비의 연속이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겠기에 ‘아이스케키 얼음과자’를 외쳤고 매서운 추위에 벌벌 떨며 신문팔이로 거리를 달렸습니다.

그리고 청년이 되어 국가의 부름을 받았고 끓는 피를 자유와 평화를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에 큰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이 무렵 우리 세대의 대 부분은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중동으로 향했습니다. 저 역시 그 대열에서 바레인. 이라크 등에서 3년간 땀 흘려 일했으며 당시 1979년을 전후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해 당하실 때였습니다.

저는 현대건설로 갔었으며 앞서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현대건설의 사장님이셨습니다. 귀국 후 그렇게 바라던 결혼과 집을 한 채 장만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또 다른 소명이 주어졌고 그래서 중단했던 공부를 하면서 낮은 곳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훨씬 흘러 현재 부산에 살면서 살아야 할 집 문제로 ‘부산시 북구 주공율리임대 아파트’에 들어가려고 서류를 작성해 들여갔습니다.

순위를 결정하는 우선권에 ‘국가 유공자’가 있었지만 저는 ‘참전 유공자’로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 했지만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참전유공자’에 ‘병든 고엽제 등외 자’ 오늘 아침 부산 금곡고등학교 정문에 이런 현수막이 걸려있었습니다. 6월 보훈의 달 <호국의 빛 애국에서, 미래의 빛 보훈에서> 우리 병든 참전자에게 미래의 보훈의 빛은 언제 쯤 비춰질까? 고개를 떨어뜨린 제 눈에는 이슬이 맺혔습니다.

셋째, 보훈 행정의 현실

현재 월남 참전자에게 지급되는 수당은 만 65세 이상 9만원으로 참으로 부끄러운 보훈 현실입니다. 더구나 참전자 모두에게 지급되어야지 어떻게 해서 만 65세를 정해 놓았습니까? 다수의 참전자는 고엽제로 시름시름 앓다가 수 없이 세상을 뜨는 데, 그나마 남은 전우는 더 이상 기다릴 힘도 여력도 없습니다. 일반적 상식선에서 당시 우리의 적이었던 월맹군이나 베트콩은 우리보다 더 나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보상 받는 다고 합니다.

심지어 6.25 당시 우리의 적인 중공군 참전자들도 그들의 나라에서 실질적 보훈 혜택을 입는 다고 합니다. 이들의 나라가 우리보다 잘살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정책 입안자의 보훈 철학의 부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에 미국이나 호주 등 선진 보훈 정책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보훈처가 힘이 없고 재정이 안 된다면 차라리 복지부에서 병든 참전노인들을 관리하는 것이 훨씬 더 났겠습니다. 이런 보훈 정책으로 애국을 요구할 수 없으며, 아무도 애국하며 희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우리 요구의 당위성과 필연성

우리 월남 참전자들이 조국으로부터 수 없이 들어온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 돌아오기만 하오, 조국이 책임지겠습니다.” 우리는 용기를 얻고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지축을 흔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았고 조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때 애석하게도 전사자 5,077명을 가슴에 품고, 상이용사 15,000명을 부축하며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병든 노병들은 잊혀 졌고 겨우 현충일에 ‘국가가 책임지겠습니다.’라는 말만 40여년을 들어왔습니다.

살아 돌아 온자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다이옥신 이라는 고엽제 증세로 인해 밤낮으로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전우들 중 다수가 너무 힘들고 지쳐 ‘스스로 삶의 끈’을 놓을 때 우리 힘없고 병든 노병들은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전우들을 태극기에 싸서 배웅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차라리 이름 모를 밀림에서 지뢰를 밟아 ‘전사’라도 했더라면 이런 치욕스럽고 구차한 삶은 없었을 텐데 하며 자조 섞인 넋두리를 해 댑니다.

첫째, 우리 요구의 당위성

A. 국가 유공자

우리의 선배 6.25 참전용사 노병들 전원 80 이 넘으신 분들로 2008년 9월 29일 부로 ‘국가 유공자가’되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누가 국가 유공자가 되었단 말입니까? 누가 보훈처의 주인이 되었단 말입니까? 땅을 치고 통곡해도 시원치 않은 기막힌 일들이 이 땅에 자행되어 왔습니다. 세계 전쟁역사에 참전자가 60년이 지난 후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아 참전수당 거금 9만원을 받고 복지 혜택 누리므로 경축한다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왜냐하면 저의 아버지도 6.25 참전자이신데 이런 명예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월남 참전자의 국가 유공자’ 차례입니다. 우리 역시 40년이 넘게 세월을 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대 부분 고엽제로 건강이 좋지 않아 6.25 선배들만큼 살 수 있을 런지 모르겠습니다. 국회에 안건상정이 다 이루어져 곧 표결만 남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쟁이 무엇인지 아셨던 저의 부모님은 파월 전 오음리 훈련소에 면회를 오셨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가슴이 찢어지셨겠습니까?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들을 끌어안고 어머니는 대성통곡하셨고 아버지는 그래도 사나이라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제가 ‘국가유공자’가 되면 제일 먼저 아버지 영전에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외칠 것입니다.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들이 국가로부터 명예를 인정을 받았습니다.”

B. 실질적 예우

① 참전자의 수당 :

월남 참전자의 수당은 실질적이어야 하며, 65세 이상을 폐지해 주시기를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리고 목숨과 바꾼 전쟁 수당이 9만원 이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은 근자에 ‘지자체’ 여기저기서 우리의 딱한 현실을 이해하는 분들이 앞을 다투어 예산을 세워 3~5만원의 수당으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문제는 중앙정부는 꿈쩍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2010년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월남참전자의 애환에 대해 매스컴이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다행스럽게 모 방송이 우리의 비참한 현장을 취재해서 잠시 내 보냈습니다. 물론 나라의 큰살림을 맡아 여기 저기 돈 쓸 곳이 많겠지만 순위에 있어 우리 병든 참전자가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건강과 생명은 결코 기다려 주질 않습니다.

② 등외 자의 수당 :

‘등외 자’는 보통 1~2달에 한 번 보훈병원에 가는 데 일상생활에서 하루는 쉬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통비등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외 자에 대한 보훈 처우는 약만 지어주면 국가는 의무를 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전상자들에게 베푸는 자비와 온정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앞 선 ‘등외 자 전우들이’ 수 없이 정부를 향해 탄원을 두드려 왔습니다.

하지만 보훈의 문은 굳게 닫혔고 그렇게 하다하다 지쳐 쓰러졌고, 급기야 하나씩 둘씩 119에 실려 중증 환자로 분류됩니다. 그때야 부랴부랴 ‘고도니 중등도니 경도’니 하며 몇 푼의 수당이 주어집니다. 이미 신장은 기능이 다 망가져서 혈액 투석을 받아야 겨우 등급이 주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이전에 ‘등외 자’에게도 얼마간 보상이 주어지면 그것으로 건강의 기회를 늘릴 수 있건만... 애원합니다. 간청합니다. ‘등외 자’에게도 희망을 주십시오.

③ 고엽제 미망인과 남겨진 자식들 :

우리가 세상 떠나면 남겨진 아내와 자식들에게 반드시 예우가 있어야 합니다.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라는 것은 이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 떠나도 국가 유공자의 명예가 가족들에게 남겨지므로 저소득층이 아닌 국가 유공자로 최소한 임대아파트 만큼은 살게 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미망인들에게 실질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주시기를 애원합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우리 참전자에게 ‘그런 약속이 주어진다면 오늘 세상 떠나도 눈을 감을 것입니다.’

둘째, 우리 요구의 필연성

우리 ‘월남 참전자들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은 어떠했습니까? 세계 최하위 빈국 중 하나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잿더미 위에 오늘의 경제성장의 풍요에 대해 누가 기초 석을 놓았단 말입니까? ‘아니오.’하는 분들은 동작동 현충원에 가보십시오, 그곳에 서면 바람결 소리에 ‘우리를 기억해주오’라는 피맺힌 절규를 들을 것입니다. 혹은 우리 전우의 피로 깔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려보십시오. ‘우리를 기억해주오’라는 한 맺힌 탄식을 들을 것입니다.

우리 전우의 ‘눈물 피 땀’은 달러로 바꾸었고 포항 제철을 비롯하여 원자력 발전소를 세웠고 경제 성장의 초석이 된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첫 파월시 우리는 2차 대전 당시 쓰던 낡은 M1 소총과 칼빈 소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선 귀국할 때는 모두 M16으로 무장했습니다. 저는 철수 부대로 무장을 한 채 1973년 3월 9일 퀴논 푸캇 비행장을 이륙 대구 동춘 비행장에 내렸습니다.

그리고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M16을 앞에 총한 채 당당하게 시가지 개선행진을 벌렸습니다. ‘아 그날의 감격을 무엇으로 대신하겠습니까?’ 조국 대한민국 사랑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결코 우리 월남참전자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 월남참전 노병들이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그리고 국위선양이 인정되고 명예가 드높여 질 때 우리는 광하 문에서 ~ 동작동까지 퍼레이드를 벌린 것입니다.

그때 우리 참전노병들은 대한민국의 아들 손자의 손을 잡고 행진하며 애국심과 국군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생생하게 가르칠 것입니다. 우리 세대가 체험한 ‘눈물 피 땀’을 후손의 가슴에 새겨 넣어 저들도 그 발자취를 따르며 대한민국을 영원히 기리게 할 것입니다.

<월남참전 고엽제후유의증 등외 자, 부산에서 정정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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